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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테레사, 성인인가 사이코패스인가? – 그 어두운 이면을 파헤치다

출처: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마더 테레사 수녀.사진=연합뉴스/AP 출처 :데일리한국(https://daily.hankooki.com)

세계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 그녀는 2016년 가톨릭 교황청에 의해 공식적으로 성인(聖人)으로 시성되며, ‘빈자의 성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인도 콜카타에서 시작된 그녀의 구호활동은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그녀의 이름은 자선과 사랑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찬사 뒤편에는 오래전부터 제기된 비판과 의혹들이 있다. 과연 마더 테레사는 진정한 자비의 화신이었을까? 아니면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고통을 미화하고, 냉혹한 결정들을 내린 권위주의적 인물에 불과했을까? 이 글에서는 그녀의 삶을 찬양 일변도로 보지 않고, 그 이면의 복잡하고 어두운 행적들을 객관적으로 조명해보고자 한다.


1. 죽어가는 이들의 집, 정말 안식처였을까?

마더 테레사가 1952년 설립한 인도 콜카타의 '죽어가는 이들의 집'(Nirmal Hriday)은 길거리에서 쓰러진 빈민들을 돌보는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 그곳의 의료 환경은 충격적일 만큼 열악했다.

1994년, 영국 의학저널 란셋의 편집장 로빈 폭스(Robin Fox)는 현장을 방문하고 “즉흥적이고 엉성한 의료”라고 평가했다. 의료 지식이 부족한 수녀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임의로 환자 상태를 판단했으며, 기본적인 의사 참여조차 없었다. 열이 나는 환자에게 무작정 항생제를 주었다가 말라리아였다는 사례도 있었고, 기본적인 위생조차 지켜지지 않아 주사 바늘을 물로 헹궈 재사용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말기 암 환자들에게 진통제조차 제공되지 않았고, 극심한 통증을 겪는 환자들이 아스피린이나 냉수로 씻는 처치에 그쳤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한 15세 소년은 수술만 받으면 살 수 있었지만, 끝내 병원 이송조차 이루어지지 않아 사망했다. 이는 자비라기보다 방치에 가까웠다.


2. 고통을 ‘아름답다’고 여긴 철학

이러한 처우의 배경에는 마더 테레사의 독특한 고통관이 있다. 그녀는 "고통은 예수와 가까워질 수 있는 축복"이라는 철학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자원봉사자들에게 환자들에게 그 의미를 설득하라고 지도했다.

몬트리올 대학 연구진이 발표한 분석에 따르면, 마더 테레사는 병자들의 고통을 줄이기보다는 이를 성스럽게 여겨 종종 미화했고, 이러한 신념이 실질적인 의료 지원을 가로막았다고 결론지었다.

더 큰 문제는 그녀가 자신의 건강이 위태로울 때는 인도 콜카타가 아닌 유럽의 최고급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남에게는 고통을 신의 선물이라며 참고 견디라 했지만, 본인은 적극적인 의료 서비스를 받았다는 점에서 이중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3. 기부금은 다 어디로 갔는가?

마더 테레사의 자선단체는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기부금을 모금했으며, 해마다 수천만 달러가 모였다. 그러나 이 돈이 실제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였는지는 불투명하다.

1991년 독일 잡지 *슈테른(Stern)*은 마더 테레사의 단체가 모금한 돈 중 오직 7%만이 실제 구호에 사용되었고, 나머지는 바티칸이 관리하거나 행방이 불분명하다고 보도했다. 뉴욕 브롱크스에 있던 사무소 계좌에는 1년에 5천만 달러가 넘는 기부금이 적립된 적도 있었지만, 회계는 비공개였으며 인도 정부조차 그 규모를 몰랐다.

심지어 에티오피아 기근 구호를 위해 지정된 성금조차 현지에 전달되지 않았고, 바티칸 은행으로 이체되었다는 내부 고발도 있다. 자선의 이름으로 돈을 모아놓고 실제 구호활동에는 인색했던 그녀의 태도는, 자선 윤리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4. 권위주의적 태도와 독선

마더 테레사는 철저히 가톨릭 교리에 기반한 운영 방식을 고수했다. 그녀의 시설에서는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가톨릭식 세례를 몰래 집행하는 일이 많았고, “천국행 티켓을 드릴까요?”라는 식의 접근은 사실상 무언의 개종 강요였다.

그녀는 피임과 낙태, 이혼에 철저히 반대했으며, 1979년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에서는 “최대의 평화 파괴자는 낙태”라고 주장했다. 인구과잉과 빈곤 문제가 심각한 인도에서도 산아제한에 반대했는데, 이는 현실의 고통보다 종교적 신념을 앞세운 태도로 평가된다.

조직 운영 역시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이었다. 기부금 회계는 공개되지 않았고, 의료 기준 개선 요청도 묵살되었다. 그녀는 외부의 비판보다는 자신의 판단과 신념을 우선시하며 조직을 장악했다.


5. 독재자들과의 유착

자선가로서 명망 높은 마더 테레사가 독재자들과 친분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그녀는 아이티의 악명 높은 독재자 장클로드 뒤발리에로부터 훈장을 받고 “가난한 이들의 진정한 친구”라고 치켜세웠다. 그 정권이 국민의 재산을 수억 달러 빼돌린 사실은 이후에 밝혀졌다.

또한 금융사기범 찰스 키팅에게 100만 달러 이상을 기부받고, 그가 유죄 판결을 받을 당시 법정에 탄원서를 제출하며 선처를 요청하기도 했다. 키팅의 범죄 수익금이었음에도 기부금 반환 요청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그녀의 태도는 도의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마무리 – 성녀인가, 냉혹한 광신자인가?

마더 테레사는 분명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였고, 생전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활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의료적 무책임, 고통의 미화, 재정 불투명, 권위주의 운영, 도덕적 기준 결여 등 심각한 문제들이 함께 존재했다.

종교적 신념이 인간의 고통보다 우선시된 현장, 그리고 기부금의 흐름이 철저히 비공개로 처리되는 구조는 결코 성인의 모습이라 말하기 어렵다. 그녀의 신념은 때로는 타인의 고통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권리와 생명이 희생되었다.

마더 테레사는 과연 진정한 자선가였을까, 아니면 신앙을 빙자해 도덕적 판단을 회피했던 광신자였을까? 혹자는 더 나아가, 그녀의 일련의 행동 양태가 감정 공감 없이 자신의 신념만을 추구하는 사이코패스적 기질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전설적인 인물들이 그러하듯, 마더 테레사 역시 신화와 진실을 구분해 보는 냉철한 시선이 필요한 때다.


참고자료

  • Robin Fox, “Mother Teresa’s care for the dying,” The Lancet, 1994
  • Serge Larivée 외, “Les côtés ténébreux de Mère Teresa,” Studies in Religion, 2013
  • Christopher Hitchens, The Missionary Position, 1995
  • Walter Wuellenweber, “Where are her millions?” Stern, 1991
  • Rashad Mammadov, “Mother Teresa: Good Intentions to Controversy,” News-Decoder, 2019